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2022년-2023년 우크라이나 역공세 (문단 편집) === 대성공으로 이어진 우크라이나군 최초의 공세 작전 === [[NATO]] 교관이 훈련하고 미군의 기계화사단 편제를 받아들인[[https://twitter.com/secretsqrl123/status/1568438928516022279|#]] 소련 소속이었던 나라의 군대가 소련제 [[T-64]], [[T-72]], [[T-80]] 전차를 앞세워 [[소련군의 종심돌파이론]]을 충실하게 실현한 전역으로, 역사 책으로밖에 접하지 못하던 광경을 실제로 실현한 공세였다. 소련군이 기갑부대를 앞세워 하르코프 방면으로 반격하기 시작했던 시점이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끝난 직후인 43년 초봄쯤이었으니, '''똑같은 광경이 약 80년 만에 같은 지역에서 다시 벌어진 셈이다.''' 이에 많은 동유럽 국가가 서방제 무장으로 전환을 진행하거나 계획 중이다. 당장 폴란드가 [[대한민국]]과 대규모 병기 거래를 체결해 한국제 무기와 차량으로 무기체계를 바꿔나가기 시작했다. 공세 성공 이후 밝혀진 바에 따르면 사실 처음부터 하르키우 방면이 주공 축선으로 낙점됐던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우크라이나군 수뇌부는 당초 헤르손을 천천히 몰아붙일 작정이었다. 하지만 젤렌스키 대통령은 뭔가 큰 한 방이 필요하다는 의사를 군부에 전했고, 일차적으로 헤르손부터 마리우폴까지 이어지는 남부 전선 전체에 대공세를 가해 마리우폴을 탈환하고 남부 회랑을 절단하는 방안을 주문했다. 왜냐하면 겨울이 다가오는 상황에서 우크라이나가 진짜로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지 의문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자칫 전쟁이 길고 지루한 소모전으로 전개될 경우 피로를 느낀 서방 국가들이 지원을 끊고 외면할 가능성도 있었으므로, 젤렌스키 대통령은 가급적 빨리 우크라이나가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할 필요가 있었다. 마침 [[마리우폴 전투]]로 서방권에서 마리우폴의 이름값이 매우 높았고, [[마리우폴]]까지 탈환하는 데 성공하면 남부전선과 동부전선은 완전히 분단되면서 러시아의 동남부 회랑은 허리가 끊긴다. 러시아군 입장에서 어느 한쪽이 위급해져도 다른 쪽에서 구하러 가려면, 더 이상 육지가 아니라 바다를 통해 가든가 러시아 본토에서 병력을 충원해서 보내야 한다. 허나 본토를 통한 보급 및 증원경로도 동부전선에서나 가능하지 남부전선은 [[크림 대교]]만 타격해서 끊으면 본토와 완전히 단절된다. 이에 우크라이나군 수뇌부가 [[미군]], [[영국군]]과 [[워게임]]을 몇 차례 돌려봤으나, 남부 회랑 공격을 지금 당장 실행하면 인명 피해가 너무 크고 전진도 지지부진할 거라는 결론이 나왔다. 젤렌스키 대통령도 워게임 내용을 보고받은 뒤 마리우폴 공략의 뜻을 접었다고 한다. 다만 군 수뇌부 역시 젤렌스키가 제시한 큰 한방의 필요성에는 동의했기에 대안을 모색했고, 이후 미국, 영국 측에서 제공한 '지금 러시아군이 병력 보충이 안 돼서 뺑뺑이를 돌리는 덕분에 동부 방어선이 취약하다'는 정보를 토대로 하르키우 일대에서의 공세작전을 미국과 영국에게 제안했다. 이를 토대로 다시 워게임을 해보자 미영 양국 모두에서 이 작전안은 성공한다는 결과가 나와 하르키우를 주공, 헤르손을 조공으로 삼는 작전계획을 확정했다고 한다. 예상대로 몇몇 지역의 러시아군 방어선은 병력 부족 탓에 매우 허술했고 우크라이나군은 그 틈을 노려 돌파할 수 있었다. 전문가의 평에 따르면 방어선이 허술하다 못해 그냥 없는 셈이나 다름없는 곳도 있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대통령 젤렌스키가 정치적인 차원에서 '큰 한 방'의 필요성을 먼저 제시하고, 우크라이나군은 이를 수행할 방법과 실현가능성을 자유롭게 모색하여 검토결과를 보고한 뒤 정치적인 목적 달성을 위한 다른 대안을 제안하고 실현시켰다는 점에서 우크라이나는 여전히 군사력 행사가 정치의 연장선으로 기능하고 있고, 문민 통수권자가 상위 목표를 제시하면 군부는 전문성을 기반으로 판단의 근거를 제공하여 보좌하는 [[문민통제]]가 우크라이나에서 제대로 작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젤렌스키가 작전의 최종목표를 '마리우폴을 탈환해야 한다'는 세부적인 군사적 목표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서방에 선전용으로 쓸 수 있을 만큼 큰 한 방이 필요하다'는 보다 상위의 목표로 제시함으로써 군 수뇌부가 통수권자의 의중을 거스르지 않는 선에서 합리적인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이번 공세의 성공을 위해서 우크라이나는 아군이나 친우크라이나 정보통에게도 자세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았고, 오히려 헤르손 방면에서의 전황에 [[엠바고]]를 걸어 [[스트라이샌드 효과|일부러 관련자들이 주목하도록 유도했다]]. 때문에 '''친우크라이나 오신트'''나 [[군사 마이너 갤러리|우크라이나에 대해 지지하는 사람]]조차도 [[헤르손 전투]]에 집착하며 헤르손 탈환 타령만 운운하였을 정도. 결국 러시아군도 우크라이나가 헤르손 탈환에 중점을 둘 것으로 착각, 헤르손 방어에 중점을 두고 많은 장비와 병력을 급하게 내려보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수뇌부에게 있어 헤르손 탈환 공세 운운과 엠바고는 러시아군을 속이기 위한 기만이었다. 결국 우크라이나는 [[손자병법|자기 편까지 속일 정도로 철저하게 준비해 성공]]한 것이다.[[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81/0003300784|#]] 우크라이나군은 공세 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해 광범위한 보급물자 소요제기 목록을 미국과 영국에 제출했고, 미국은 그 목록의 내용을 보고 할 수 있다는 판단이 섰다고 한다. 그래서 전쟁 이전부터 NATO식 교육을 시키고 전쟁 초기에는 이들의 전술을 같이 감독하던 [[펜타곤]]을 비롯한 미국 군부는 우크라이나군의 기동에 딱히 놀라지 않았고 '당연히 저 정도는 할 수 있겠지.' 라는 반응이었다고 한다. 다만 훈련과 실전은 언제나 별개인만큼, 미국이 놀라지 않았다는 이러한 주장은 어느 정도 선전용일 수도 있다.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는 미국으로서는 세계에 이러한 반격이 일회성의 사건이 아니며, 우크라이나군이 러시아를 이길 수 있는 역량을 가졌음을 주장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애초에 제대로 훈련된 병력이 많이 필요한 작전이었기에 미국도 성공적인 공세를 높이 평가했다. 10월 10일경까지 우크라이나가 동부에서 탈환한 영토는 약 12000km²로, 한국 [[수도권(대한민국)|수도권]]의 면적과 맞먹는다. 여기에 남부에서 추가적으로 약 1000km²를 탈환했다. 11월 10일부터 헤르손에서의 반격 공세가 진행되었으며 우크라이나군이 11월 11일에 헤르손을 완전히 탈환해 결과적으로 약 6000km²의 영토를 탈환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